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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결번 아니지만...LG 팬들이 절대 잊지 못하는 '낭만 투수'

오마이뉴스
영구결번 아니지만...LG 팬들이 절대 잊지 못하는 '낭만 투수'

1990년대 엘지 트윈스에 이상훈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고려대 4학년 때 성균관대를 상대로 14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며 이름을 알렸고, 처음으로 신인 계약금 2억 원을 받고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선수였다. 2년 차인 1994년에는 18승으로 다승왕에 오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이듬해에는 선발 20승의 금자탑을 쌓으며 선수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 또 1997년에는 마무리로 보직을 옮겨 역대 최다 세이브포인트 기록(10구원승과 37세이브)을 세우며 또 다른 봉우리에 올랐다.

말하자면 그는 최고의 유망주였고, 프로 입단 3년 차에 최정상에 올랐으며 5년 안에 투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선수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전성기를 통해 팀의 전성기를 이끈 상징적 에이스이기도 했다. 보통 그런 선수들이 어떤 것을 목표로 삼고, 어떤 것을 조심하며, 어떤 말과 행동을 하게 될지는 대략 정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렇게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는 5년을 보낸 뒤 해외무대 도전을 선언했다. 물론 그거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 박찬호라는 낯선 대학생이 LA 다저스에 입단하며 한국인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투수 선동열이 일본 프로구단으로의 임대라는 보다 현실적인 방식으로 또 하나의 길을 열고 있었다. 이상훈이라고 못 할 것 없었고, 국내 최고에 오른 뒤에도 아직 식지 않은 열정이 있는 젊은 선수라면 충분히 해볼 만한 도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훈의 특별함이 드러난 것은, 몇 가지 불운이 겹쳐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한국 최고의 투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1997년 겨울, '박찬호보다 더 나은 한국인 투수'를 찾아보자는 관심 덕분에 순탄하게 풀려가는 듯하던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입단이 경쟁 구단들의 문제제기로 차질을 빚기 시작하더니, 몸값이 후려쳐지고 결국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어찌 해볼 수 없는, 그저 불운이었다.

그래서 또 다른 대안을 찾아 일본으로 선회한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이미 선동열과 이종범이 경험한 경로를 밟아간 무난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도 그는 충분히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고, 선수로서의 가치를 입증했다. 1999년에는 중간 계투로서 마무리투수 선동열의 앞 순서를 책임지며 무려 95.1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2.83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공격의 첨병 이종범과 함께 '주니치의 한국인 3총사'로 불리며 팀을 정규시즌 1위로 이끄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물론 한국에서처럼 독보적인 최고의 자리는 아니었지만 일본에서도 강팀의 주전 멤버로서 인상적인 활약을 하는 투수. 그것만으로도 선수로서 또 하나의 성공이었고 보스턴 입단 과정에서 약간 구겨졌던 자존심 정도는 충분히 세우고도 남았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그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 그는 다시 한번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고, 그 선언은 한국과 일본 야구계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 그가 거둔 성공은 그것 자체로서 자랑할 만한 것이었지만, 곧바로 미국에서의 성공을 장담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메이저리그를 정점으로 일본은 트리플에이, 한국은 더블에이의 상위 팀 수준 정도로 흔히 평가하던 시대였다.

한국 최정상의 투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정도의 활약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럭저럭 상위권에 머무른 것은 '조금 부족하다'는 판단의 근거가 됐다. 아직 긁지 않은 복권보다, 오히려 적당한 소액으로 당첨된 복권의 가치가 더 낮게 평가되는 이치랄까.

그의 도전을 응원하던 팬들도 고개를 저었다. 그만 만족하고 트윈스로 돌아오기를, 꼭 도전을 계속하고 싶다면 차라리 일본에서 한두 시즌 더 머물며 보다 확실한 능력을 입증한 뒤 다시 시도하는 편이 좋겠다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훈은 그 모든 만류와 조언을 뿌리친 채 끝내 태평양을 건넜고, 고생을 사서 하기 시작했다.

물론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를 지켜봐 오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는 데 성공했고, 마이너리그에서의 검증을 거치는 귀찮은 과정이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2000년에는 한국 프로야구 출신 중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9경기의 적은 기회를 끝으로 방출됐고, 다시 한번 오클랜드로의 입단과 방출을 경험했다. 그 사이 그는 연습 파트너가 없어 공원 철망에 공을 던지는 외로운 도전을 이어가기도 했다.

끝내 메이저리그로 복귀하는 데 실패한 그는 200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마무리투수로서 헌신적으로 활약하며 친정 팀 엘지 트윈스를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 문턱까지 이끌기도 했다. 그것이 결말이라면, 해외 무대 도전을 마치고 복귀해 제2의 전성기를 보낸 선수의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아주 특별한 결말이 남아 있었다.

트윈스의 전성기와 암흑기를 동시에 상징하는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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