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제 때문에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쫓겨난 청년

형은 대구10월항쟁 주역이고 자신은 남로당 간부였던 박정희의 집권기에 연좌제를 완화하는 조치가 있었다. 김대중과 박정희가 맞붙은 4·27 대선을 한달 앞둔 1971년 3월 22일, 박 정권은 박경원 내무부 장관을 통해 '연좌제 완전 폐지' 방침을 표명했다.
이날 <경향신문>에 따르면, 박경원은 "일부 신원조사 대상자들이 불순세력에 속아 본의 아닌 과오를 저질렀던 경우에도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음을 없애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본인의 잘못이 없는데도 가족이나 친족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로 인해 연좌제 폐해는 종래에 비해 줄어들었다. 하지만 양적 차이일 뿐, 질적 차이는 아니었다. 그 폐해는 그 뒤로도 계속 나타났다. 1980년 헌법의 제12조 제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연좌제에 대한 불만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1971년 이후에도 그 폐해가 계속됐기에 이런 규정이 나오게 됐다.
<탐라문화> 2025년 제80호에 실린 역사학자 정순임의 논문 '공식 기록물 속에 나타난 4·3 연좌제'는 "공식적으로 연좌제 폐지를 약속했지만 실제로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라면서 1971년 이후로 연좌제의 적용 범위가 축소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종래에는 '8촌 이내 부계혈족 및 4촌 이내 모계혈족, 부(父)의 8촌 이내 부계혈족 및 4촌 이내 모계혈족, 혈족의 배우자, 혈족의 배우자의 혈족, 배우자, 처의 부모, 배우자의 혈족, 배우자의 혈족의 배우자'에게 연좌제가 적용됐다. 그랬던 것이 위 조치를 계기로 부모·형제·자매·자녀·배우자로 한정됐다. 그렇지만 어차피 연좌제의 주된 적용 대상은 배우자와 부모·형제자매·자녀였다.
연좌제가 축소될 기미를 보였지만 그 폐해가 여전했던 1970년대 초반에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인 20대 청년 양성홍도 그 피해를 겪었다. 1947년에 제주시 연동리에서 출생한 그는 제주 4·3항쟁 참여자이자 피해자인 양두량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양천종도 4·3 피해자였다. 이것이 그를 선관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게 만든 이유였다.
<4·3과 역사> 2023년 제23호에 실린 양성홍의 증언 대담록 '한때 원망했지만 지금은 너무도 그리운 아버지'에 그 사연이 담겨 있다. 대담에서 그는 1970년에 선관위 직원이 됐다가 선거관리위원장이 "그만두라"고 해서 사직했노라고 진술했다. 채용 당시에 양성홍의 신원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선관위가 뒤늦게 가족관계를 파악하고 사직을 압박했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수난
연좌제로 인한 그의 피해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선관위를 그만둔 뒤에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일이 있었다. 위 대담록에 따르면, 경찰의 신원조회 뒤에 생긴 일을 양성홍은 이렇게 증언했다.
전체 내용보기 ...
이 뉴스, 어떠셨어요?
탭 한 번으로 반응 · 로그인 불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