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동생은 20살 형님을 오늘도 기다립니다
2025년 무더운 여름 어느 날이었다. 내가 해설사로 근무하고 있는 경기도 오산 유엔군 초전기념관에 한 노부부가 들어왔다. 남편인 이석진(92) 어르신은 다짜고짜 죽미령 전투의 전사자 명단을 보여달라고 했다. 왜 명단이 필요한지 물으니 6·25전쟁 당시 스무 살이던 자신의 형이 전사했다며 혹시 명단에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우리 기념관은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와 북한군의 전투에 관한 정보밖에 없고 국군에 관한 기록은 없다고 설명했다.
어르신의 형은 전투 중 전사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 초기, 오산에서 평택 방향으로 행군하던 중 1950년 7월 10일 아군의 오폭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함께 참전했던 동네 형이 전해주었다고 한다. 전사 통지서 한 장 받지 못했고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7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석진 어르신은 다섯 형제 중 막내이자 마흔다섯 살 어머니가 어렵게 낳은 늦둥이였다. 다섯 살 위 석기형은 그런 동생을 끔찍이도 아꼈고, 덕분에 동네 아이들은 어르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동생의 짓궂은 장난과 떼에도 화 한 번 내지 않았던 형은 그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립 수원병원에서 근무한 수재였다. 석기형은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쳤다. 형이 밥때가 지나도록 야학에서 오지 않는 날이면, 어르신은 형을 데리러 가곤 했다.
형님이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뒤 어머니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화를 내다가도 이내 통곡하는 일이 늘어났고, 보살펴야 할 막내아들과 집안 살림도 큰형수에게 맡긴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형님의 소식은 75년째 감감했다. 그러던 2025년, 어르신의 손자가 육군에 입대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손자가 집안에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분이 있다는 서류를 제출하자 군 관계자는 손자와 함께 큰할아버지의 전사 사실을 확인했고 DNA도 채취했다. 이는 가족 중에 6·25전쟁 전사자가 있고 아직 유해를 찾지 못했다면 친·외가 8촌 이내 인척의 DNA를 채취해 유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국방부의 사업 덕분이었다.
올해 3월 중년 남자 세 분이 기념관을 찾았다. 유물을 대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아 조심스럽게 직업을 물었다. 그중 한 분은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군무원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기념관에 오셨던 이석진 어르신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어르신은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계신데, 92세라는 나이가 걱정되어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는지 자주 전화로 여쭤보곤 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나는 군무원분에게 DNA 대조 작업이 왜 이렇게 늦는지 물어보았다.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찾아야 할 사람이 너무 많고, 찾는 사람은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유가족을 직접 찾아다니며 DNA 시료를 채취하는 탐문담당은 전국에 26명, 그렇게 모인 시료와 발굴된 유해를 일일이 대조 분석하는 DNA 분석관은 단 10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념관 어르신도 1년이 넘도록 기다리던 소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6·25전쟁 당시 전선으로 뛰어들었던 국군은 100만 명이 넘는다. 그중 16만 3천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전쟁 중 2만 9천여 명의 유해가 수습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13만여 명의 유해가 우리 산하에 남겨졌다.
전체 내용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