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가발공장 노동자, 어떻게 대통령을 몰락시켰나
1970년대에는 인건비를 떼먹고 노동자들의 휴식권을 박탈하는 방법으로 이윤 축적을 도모하는 기업들이 상당히 많았다. 국가권력은 노동자들을 억누르는 방법으로 그 같은 사실상의 착취 활동을 도왔다.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가로채는 가운데서 벌어진 당시의 현상을 고도 경제성장으로 포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런 부조리에 맞서 싸웠다. 1970년 11월 13일에는 전태일이 스스로를 내던졌고, 1979년 8월 11일에는 김경숙이 자신을 희생했다. 진보냐 보수냐의 패러다임으로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이런 죽음들을 디디고 한국 사회는 지금 이 수준의 발전에 도달했다.
특히 김경숙의 투쟁은 노동문제뿐 아니라 한국 정치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박정희를 몰락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이 투쟁은 YH 노동자들을 지원한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 대한 박정희의 탄압을 가중시키고, 경남 거제 출신인 김영삼에 대한 박정희의 탄압은 1960년 4·19 혁명의 도시인 경남 마산에서 1979년 부마항쟁이 좀 더 용이하게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부마항쟁 대처법을 놓고 내분을 빚다가 10월 26일의 궁정동 총성과 함께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YH 노동자들과 김경숙의 투쟁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의 끝자락에 위치했다.
노조가 있는 회사에 다니는 걸 자랑스러워한 김경숙
김경숙이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21년 전인 1958년이다. 지금은 광주광역시에 속해 있는 전남 광산군 비아면이 출생지다.
1965년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고물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세 살 적은 남동생을 돌보며 가사를 도맡았다. 돈벌이에 뛰어든 것은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 이전이다. 1911년 12월 22일 자 <한겨레>는 "72년 광주 남국민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학력을 다한 그는 겨울방학 때 이미 광주에 있는 누에고치공장에서 일을 했다"라고 기술한다.
당시의 수많은 10대들이 그러했듯, 그도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했다. "광주 공장에서 받던 월급 5천 원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 달에 1만 원을 벌 수 있는 서울로 상경한 것이 1973년"이라고 위 특집은 말한다.
1972년 3월 18일 자 <매일경제>에 따르면, 그해 2월 15일에 서울시가 발표한 짜장면 협정요금은 60원이지만 3월 중순 현재의 실제 시중가격은 80원이었다. 짜장면값이 지금의 100분의 1 정도였던 시절에 김경숙은 월 소득을 5천 원에서 만 원으로 올리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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