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이스라엘 땅의 경계는 어디까지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이 시작된 뒤에 지중해 동부 해안 지역에서 군사 공격을 계속해 온 이스라엘 방위군과 이스라엘 수상은 전 세계로부터 비난받았고, 이스라엘과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기관도 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비판할 때 극우 강경 세력이 참여한 이스라엘 정부가 히브리 성서가 말하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려 한다고 지적하거나, 골란 고원과 요단강 서안지구에 이어 가자지구와 레바논 남부도 영토로 병합하려 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이 주장의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해 히브리 성서 본문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땅의 경계는 크게 세 가지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가나안 땅’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이 점령할 곳으로 등장한다(예를 들어 민수기 34장).
이 영역은 현대 이스라엘-이집트 국경에서 시작해 지중해 해안과 레바논 남부 지역을 포함하고,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을 따라 내려오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 전통은 셋 중에 중간 크기의 땅을 묘사하는 전통이며 현대의 가자지구와 고대 플레셋 도시들, 그리고 레바논 남부 지역을 포함한다.둘째, 이스라엘 땅을 가리키는 가장 유명한 표현은 ‘단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인데(예를 들어 사사기 20장 1절), 현대 이스라엘 북쪽 국경도시 단부터 남부 네게브의 중심도시 브엘세바를 포함한다.
용례를 분석하면 레바논 남부와 헤르몬산, 페니키아 도시들과 가자 지구 근처 해변은 포함되지 않는다.
셋 중에 가장 크기가 작은 땅을 묘사하며 이스라엘의 실거주 지역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전통은 신이 가나안 땅을 수여했으나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 있다는 역사적 사실로 서로 화해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셋째, ‘약속의 땅’이라는 용어는 신이 아브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곳인데, ‘이집트 강부터 그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준다고 했다(창세기 15장 18절).
이때 이집트 건천(낙할)이 아니라 이집트 강(나하르)이라고 말하여 나일강부터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역을 모두 포함한다.
셋 중에 가장 큰 크기의 땅을 묘사하며, 다윗왕이 다스렸다는 왕국의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역대기하 9장 26절).이렇게 볼 때 히브리 성서가 묘사하는 이스라엘 땅의 경계는 한 가지로 단정할 수 없다.
중세 랍비들도 이런 문제를 인식했고, 라쉬는 ‘가나안 땅’에 나오는 레보 하맛이 튀르키예 남부에 있다고 주장하며 ‘약속의 땅’에 맞추어 해석했다.
그와 달리 아쉬토리 랍비는 ‘가나안 땅’이 과거에 정복하라는 명령을 상징하고 ‘약속의 땅’은 미래에 있을 일을 예언한 것이라고 보았다.
현대 학자들은 히브리 성서가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형성된 전통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견해가 포함돼 있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이와 더불어 역사 비평적인 관점에서 보면, 히브리 성서가 형성되던 시기에 ‘영토’나 ‘국경’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유의해야 한다.
첫째,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은 그 긴 국경에 철책이나 검문소를 설치해 운영할 능력이 없었다.
누가 한적한 곳을 통해서 이동하는 것을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여행객이 지역 중심지에 들어섰을 때 드디어 문제 삼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땅을 잘 정의된 하나의 정체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둘째, 이런 이유로 고위 정치 권력자들은 지역 중심지의 지배자가 자기 밑으로 들어와서 정기적으로 세금을 내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조세 행정을 최고 권력자가 직접 관리하는지, 지역 호족이 관리하는지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주요 도시들 간의 네트워크가 기본적인 통제망이 된다는 뜻이고, 거주자가 없는 건조한 광야나 늪지대, 깊은 산속이 어느 나라인지 크게 상관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고대 서아시아 문학이 논하는 영토나 국경은 매우 개괄적이고 이상적인 의미를 지니며 문학적인 표현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논의를 요약하면 ‘거룩한 성경’에서 현대 정치 상황에 적용할 원칙을 찾을 수 있다는 개인이나 집단이 있다면, 그 의견은 매우 주관적이고 의도가 의심되는 해석에 기초했다고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라는 현대 국가가 종교 경전에 기록한 원칙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극단적인 방법으로 추구한다고 하면서 그 국민 전체를 하나로 싸잡아 비판하는 것 역시 ‘성경’이라는 상징을 이념적으로 사용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의 참상을 외면한 채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는 선정적인 논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기적인 해결을 염두에 둔다면,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위해 이념 전쟁을 벌이는 정치인과 사변가들을 멀리하고, 상식적인 판단을 기초로 갈등 상황을 정상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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