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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 입고 압록강 철교를 넘은 의친왕

오마이뉴스
상복 입고 압록강 철교를 넘은 의친왕

임실 성수산은 '새 나라를 연 창업 군주들의 성지'로 불린다. 성수산 상이암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환희담 설화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삼청동 전설이 깃들어 왕의 기도터로 알려진 곳이다. 지난달 29일, 성수산 상이암으로 오르는 탐방객 두 명을 만나서 함께 돌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성수산 상이암 앞에는 이십여 미터 높이의 작은 동산만큼 큰 여의주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이 바위 왼쪽은 포장된 임도이고, 오른쪽은 천 년의 왕건 기도 설화를 간직한 돌계단 길이다.

임실 성수산에서 대한제국의 역사를 다시보다

상이암의 무량수전을 바라보는 여의주 바위 아래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필적이라고 전해지는 '三淸洞(삼청동)'의 세 글자를 각자(刻字)한 비석(높이 114cm, 폭 55cm, 두께 33cm)이 맞배지붕의 아담한 비각에 안치되어 있다. 비석 왼쪽에는 희미하게 '太祖大王筆(태조대왕필)'이라 새겨졌던 암각 글씨는 이제 풍화로 희미해져 분간이 힘들다.

삼청동비각 옆에 직사각형의 오석 전면에 세로 두 줄로 '朝鮮太祖高皇帝御筆 三淸洞碑閣重修碑(조선태조고황제어필 삼청동비각중수비)'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음각되어 있다. 옥개석(비석 머리)에는 팔작지붕 형태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장식하여 격식을 갖추었다.

'太祖高皇帝(태조고황제)'라는 다섯 글자에 주목하였다. 삼청동 비석에는 '태조대왕'이, 삼청동비각중수비에는 '태조고황제'가 새겨져 있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대한제국'의 수립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하며 황제로 즉위하였다. 임실 성수산 상이암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역사적인 흔적을 탐방객과 함께 살펴보며 이야기하였다.

19세기 말에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이곳 성수산 상이암에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삼청동 비각의 뒤쪽 여의주 바위의 세로 암벽에는 인근 지역의 관리나 선비 등 많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원명 교체기라는 대륙의 격랑과 쇠락해 가는 고려의 국운 속에서 이성계가 간절히 새 시대를 갈망했듯, 열강의 각축전으로 벼랑 끝에 선 대한제국의 위기 앞에서도 국난 극복을 향한 절박한 염원이 다시금 이곳 상이암으로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적인 세 인물로 고종, 순종과 의친왕(이강)을 선정하고, 탐방객과 의친왕에 대한 서사를 상이암 삼청동비각 앞에서 함께 나누어 보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및 대동단 관련 판결문 등 사료 연구에 따르면, 이강(1877~1955)은 고종 황제의 아들로서 1895년에 유럽 6개국을 방문했다.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아들인 의화군(이강)을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에 파견했다. 서구 열강과의 외교적 관례를 표방한 방문이었으나,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견제하고 서구 열강의 지원을 끌어내 보려는 외교적 포석이었다. 이강은 10대 후반의 나이였음에도 서양 외교관들은 그를 사교적이고 총명한 인물로 평가했다.

이강은 1899년경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1900년 8월에 의친왕(의왕)으로 책봉되었다. 1901년 3월부터 1905년까지, 그는 버지니아주 세일럼의 로어노크 대학(Roanoke College)과 오하이오주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Ohio Wesleyan University)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에 한국 학생들과 만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훗날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는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들과도 교류하였다.

대동단의 제2차 독립선언서와 만세 시위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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