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럼] 가스라이팅, 당신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심리학
1944년 영화 ‘가스라이트’에서 남편 그레고리는 밤마다 몰래 다락방에 올라가 가스등을 켠다.
그로 인해 집 안의 불빛이 희미해지자 아내 폴라가 말한다.
“불빛이 어두워지고 있어요.” 그레고리는 태연하게 대꾸한다.
“당신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야.
불빛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 폴라는 혼란에 빠진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내가 이상해진 걸까?’ 결국 그녀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가스라이팅의 본질이다.
상대의 기억과 감정을 지속해서 부정해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심리적 조종.
이는 80년 전 영화 속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가스라이팅은 연인 사이에서 흔히 나타난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왜 혼자 상처받고 난리야?” 이런 말이 반복되면 피해자는 자신의 감정조차 믿지 못한다.
화가 나도 ‘내가 예민한 탓이겠지’라며 삼키고, 슬퍼도 ‘내가 유난을 떠는 건 아닐까’라며 억누른다.
직장에서는 한층 교묘하게 작동한다.
상사가 분명히 지시한 업무를 나중에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시치미 떼거나, “다들 너한테 불만이 많아.
나니까 네 편 들어주는 거야”라고 고립을 유도한다.
국내의 한 직장인 설문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0%가 이런 경험이 있다고 답했으며, 상당수는 그것이 가스라이팅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가족 간 가스라이팅은 가장 오래 지속하면서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내가 언제 너한테 그랬어?
네가 어릴 때라 기억을 잘못하는 거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왜 상처를 받고 그래?” 어린 시절부터 이런 환경에 노출된 사람은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의 감정과 기억을 불신하는 심리가 깊게 뿌리내릴 수 있다.오늘날 가스라이팅의 가장 새롭고 거대한 가해자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AI 알고리즘이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골라 보여준다.
특정 정치 성향이나 건강 정보, 사회 현상에 관해 플랫폼이 보여주는 콘텐츠는 현실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같은 내용에 끊임없이 노출되면 ‘세상 사람 모두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영화 속 그레고리가 가스등을 껐다, 켰다 하며 “불빛은 변하지 않았다”고 우겼다면, 알고리즘은 처음부터 어두운 방만 보여주며 “원래 세상은 이렇게 생겼어”라고 말하는 셈이다.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기록이다.
가해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런 일은 없었어’라는 부정이다.
날짜와 함께 남긴 기록은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아주는 닻이 된다.
AI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다양한 매체와 시각을 접하는 습관, 이른바 ‘미디어 식단의 다양화’가 같은 역할을 한다.
우선 정보의 출처를 스스로 다변화해야 한다.
추천 콘텐츠에만 의존하지 말고, 나와 관점이 다른 매체와 저자를 의도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이것이 검색과 구독의 주도권을 알고리즘이 아닌 ‘나’에게 되돌려놓는 방법이다.
디지털 환경도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시청 기록을 삭제하고, 원하지 않는 주제에는 ‘관심 없음’, ‘채널 추천 안 함’, ‘싫어요’ 등을 눌러 차단한다.
때로는 로그아웃 상태로 콘텐츠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사람에 의한 가스라이팅이든, AI 알고리즘에 의한 것이든, 그 영향에서 벗어나려면 나와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과 꾸준히 소통해야 한다.
고립이야말로 가스라이팅이 뿌리내리기 가장 좋은 토양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 관계 안에서, 혹은 이 플랫폼 안에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있는가’라고.영화의 마지막에서 폴라는 마침내 진실과 마주한다.
그레고리는 폴라의 이모가 숨겨둔 보석을 찾으려고 밤마다 몰래 다락방의 가스등을 켰고, 그 때문에 거실의 불빛은 실제로 희미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내면의 작은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스라이팅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출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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