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두 시간의 기적, 청산도 구들장 논에 벼꽃이 피었다

한여름의 한복판, 남해의 푸른 바다를 가르며 청산도의 가파른 산비탈에 서면 기이하고도 눈물겨운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계단식으로 첩첩이 쌓아 올린 투박한 돌축대 위, 손바닥만 한 논들 위로 희끗희끗한 안개가 내려앉은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백합처럼 화려하지도, 장미처럼 매혹적이지도 않은 유백색의 미세한 존재들. 바로 벼꽃이다. 그러나 이 작은 꽃은 아름다움을 위해 피어난 꽃이 아니다. 척박한 돌밭을 생명의 터전으로 바꾸어 온 사람들의 땀과 기다림이 마침내 꽃의 모습으로 드러난, 한 계절의 가장 조용하고도 숭고한 기적이다.
사람들은 봄날의 벚꽃이 지니는 찰나의 미학을 찬미하며 그 짧은 개화에 환호하지만, 농부의 눈에 비친 벼꽃의 찰나는 벚꽃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애틋하고 비장하다. 특히 사방이 온통 돌밭이라 물 한 모금 가둘 수 없었던 이 척박한 섬땅에서 피어난 벼꽃은 그 존재 자체로 기적에 가깝다.
다른 꽃들처럼 나비를 유혹할 그럴듯한 향기도, 세상을 현혹할 입체적인 미모도 가지지 않았지만, 벼꽃은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꽃보다 깊고 단단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어 찬사를 받기보다 타인의 생명을 살려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안으로 품어낸 까닭일까.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 햇살이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단 한두 시간 동안만 문을 열었다가 이내 굳게 닫혀버리는 은밀한 개화. 그 찰나의 순간에 한 해 농사의 성패가, 그리고 섬사람들의 모진 목숨줄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명이 햇살 아래 숨을 죽이는 정오, 벼꽃은 화려한 색채 대신 가장 진실한 태도로 자신의 온 생을 건 고요한 고백을 시작한다.
돌밭에서 피어난 가장 조용한 기적
땅은 사람의 땀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땀을 쏟은 만큼, 정성을 들인 만큼 응답하는 법이다. 청산도 농부들의 사계절은 땅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긴 수행과도 같다. 돌보다 단단한 인내로 흙을 일구고, 하늘의 기색을 살피며 계절의 숨결을 견디는 시간 끝에 비로소 한 송이 벼꽃이 피어난다. 그것은 노동의 결실이라기보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끝내 저버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가장 고요한 약속이자, 이 땅에서 피어날 수 있는 가장 눈부신 결실의 형태 같다.
청산도는 본래 경사가 매우 심하고 돌이 많아 비가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고 밑 빠진 독처럼 빠져나가는 암반과 자갈 중심의 척박한 섬이었다. 쌀 한 톨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섬사람들은 산비탈의 돌을 깨고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청산도 구들장 논은 17세기 초 조선 선조·광해군 대에 외지인들이 섬에 들어와 이주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양란의 풍파가 지난 뒤, 함양 배씨 배진혁 선생이 부흥리에 터를 잡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량 확보를 위한 경작지가 더욱 절실해졌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가파른 골짜기까지 올라가 돌을 쌓고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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